민족음악의 아버지 지영희 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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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희(1909~1980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예능보유자였던 지영희는 1909년 9월 27일 포승읍 내기리에서 아버지 지용득(池龍得)과 어머니 김기덕(金基德) 사이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지천만(地千萬)이었지만 마을에서는 어려서부터 지한식(地漢植)으로 불렀고, 영희는 그의 아호(雅號)이다.

지영희가 11살 되던 해인 1918년 그의 가족은 포승읍 내기리 안터에서 이웃 마을인 만호리 원터로 이사하였다.

포승읍 내기리와 만호리는 경기만에 가까이 있어 무속신앙이 발달했고 충청도 내포지방의 소장수들과 곡물을 실은 배와 어선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지영희가 태어난 포승읍 내기리 안터마을(왼쪽 중간)
지영희 가문은 포승읍 일대에서 무업(巫業)으로 생계를 이었갔다. 지문일가(地門一家)의 세습무(世襲巫) 전통은 할머니 전석준에서 어머니 김기덕, 작은어머니와 여동생 지옥희로 이어졌다. 지영희의 스승이었던 지용구와 음악적 스승이자 동지였던 지갑성, 경기민요 명창 지연화도 지문일가(地門一家)의 명인들이다.

어린 지영희는 한문과 근대교육을 받으면서 가문 대대로 이어오는 무속음악을 자연스럽게 내려 받았다. 11세에 만호리로 이주한 뒤로는 경기도도당굿의 명인들로부터 다양한 기예를 익혔다.

지영희에게 처음 기예를 가르친 인물은 이석은이다. 지영희는 11살의 나이에 이석은에게 승무, 검무, 굿거리를 배웠다.

22세에는 조항련에게 호적을 배웠고, 23세에는 정태신에게 양금을 배웠다. 또 24세에는 지용구에게 해금을 배우고, 양경원에게는 피리를 배웠다.

그 뒤에도 김계선에게 풍류대금을, 평택 이충동 출신으로 경기시나위 동령제 창시자인 방용현에게 민간풍류대금을, 최군선에게는 농악을, 오덕환에게 무용장고 12채를, 박춘재에게는 경기서도민요를 배우는 등 배움의 열정을 이어갔다.

지영희의 배움의 열정은 민속과 무속을 아우르는 폭넓은 이해를 갖게 하였다. 그의 뛰어난 연주실력도 배움의 열정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경지였다.

지영희는 우리 국악뿐만 아니라 창작분야의 작곡에서도 1세대에 해당하는 아주 대단한 능력을 갖춰나갔다. 지영희는 ‘종합예술인’이라고 비유할 정도로 해금과 피리를 비롯해 못 다루는 악기가 없이 모두 다루었고, 관현악 편곡과 지휘, 무용까지 모든 예술분야를 겸비했다.

이처럼 모든 장르의 예술분야를 섭렵한 예술가는 다시 탄생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1)

지영희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14살 때부터 몇 차례 가출하였다. 가출 후 그는 굿판에서 악사를 했고 벌어들인 돈은 꼬박 모아두었다가 몇 년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영희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안 형편도 안정되자 새로운 음악의 도전에 모든 것을 투자했다.

배움을 통해 얻어진 지영희의 출중한 기예는 각 마을 두레패에서 영입 경쟁이 벌어져 마을사람들이 지영희의 집으로 와서 농사일을 대신 해주거나 선물을 보내는 것으로 구애(求愛)를 보냈다.

하지만 지영희는 고향에서만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부모가 그랬듯 평생 천대받는 무속인으로 살기보다 인정받는 음악가이기를 원해 1937년 서울로 올라와 당대 최고의 고수이며 무용가였던 한성준의 조선음악무용연구소에 들어가 한성준과 최승희무용단의 악사로 활동하며 민속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국악 위기 극복을 위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한성준(1875~1941년)
이전까지는 무속의 반주악기로만 머물렀던 해금과 피리를 독주악기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곳에서였다.

이 시기 조선음악무용연구소의 한성준 음악무용단원으로 일본에 가서 음악무용 발표공연을 하고 음반을 취입했으며, 최승희무용단에서 관악무용곡을 편곡해 국내외 순회공연에서 연주하며 각 지방의 민속음악과 중국음악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지영희의 음악세계를 넓히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지영희는 1945년 평생 음악적 동반자로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였던 성금연과 혼인을 한다.

성금연은 가야금산조의 창작과 판소리, 가야금 병창, 아쟁, 해금, 단소 등 다양한 연주에서 능했던 명인으로 당대 최고 명인들끼리의 결합은 음악적으로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발휘했다.

두 사람의 삶은 연주를 할 때나 작곡을 할 때도 서로 들어주고 의견을 주고받는 상호적 관계였다.
지영희와 부인 성금연
일제로부터 해방 후 위기를 맞은 우리 국악계는 국악을 재건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일이 급선무였다.

해방직후 지영희가 국악건설본부 창설에 참여하고 대한국악원 창립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서구문화가 밀려오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없어 국악재건을 하기 위한 일념 때문이었다.

지영희는 1946년 민요 60곡을 레코드 취입하였고 서울방송국 전속국악사로도 활동하였다.

1947년에는 대한국악원에서 주최했던 국극 선화공주 공연에 12인조 악단을 조직하여 서양 오페라처럼 무대 전면에 세운 뒤 처음으로 지휘하면서 국악관현악단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1948년에는 음악연구소를 설립하였으며, 1953년 대한국악원 산하에 ‘지영희고전음악연구소’를 설립하여 기악과 고전무용을 가르치는 등 국악의 재건과 국악현대화를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지영희가 가장 잘 다룬 악기는 해금과 피리다. 하지만 태평소나 장구에도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지영희류 해금연주는 무속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해금산조에서 장단 사이로 드나드는 가락의 놀음새와 잉어질의 코믹한 연주법은 지영희류 해금연주의 특징이다.

다른 연주자들과 달리 무용반주, 민요반주, 기악합주, 독주와 같이 모든 분야에 해금연주를 하였던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지영희는 피리연주에서 더름치기, 혀치기, 목튀김 같은 특수주법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연주는 가락구성도 다양하고 섬세하여 무용가들이 매우 좋아하였다.

그 바탕에는 지영희 스스로 무용을 학습해 무용가들의 마음을 잘 읽어 연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성금연, 지영희, 김소희, 김윤덕(사진 왼쪽부터)
경기시나위 안산제(安山制)는 지영희(池瑛熙)의 율제(篥制)로 해금산조는 대금산조의 선율을 많이 본받았고 섬세하고 굴곡이 많다. 경기도 민요처럼 가볍고 경쾌하면서 중중머리 부분에서는 장단 사이로 드나드는 가락의 놀음새와 잉어질의 익살스러운 연주법이 특색 있다. 피리 연주는 더름치기, 혀치기, 목튀김 같은 특수주법을 구사한다.
지영희의 음악세계는 전통의 충실한 계승에만 있지 않다.
그의 위대함은 전통을 계승하고 재창조하는 데 있었다. 지영희는 그동안 반주악기로만 머물었던 해금, 피리, 태평소와 같은 악기를 독주악기로 발전시켰다.
악기로 독주를 하려면 그에 맞는 음악이 필요했다.
지영희류의 해금산조, 피리산조, 시나위는 그렇게 해서 탄생하였다.
특히 즉흥성이 강조되는 경기시나위는 지영희에게서 크게 발전하였다. 지영희의 국악현대화 작업은 민속음악, 무속음악의 채보, 작곡, 교육, 관현악연주로 이어졌다.
그동안 민속음악, 무속음악은 구음으로 전해졌을 뿐 오선보에 기록되지 못했다.
위기상황에서 오선보에 기록되지 않고 대중의 외면을 받는 음악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1960~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미신타파를 외치면서 국악의 뿌리였던 무속음악, 민속음악은 미신의 범주에 들어가 소멸될 위기에 처하게 됐다.
지영희는 국악교육과 연주를 위해서도 가락을 오선보에 기록하고 편곡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했다고 여겨 전국을 돌아다니며 채보활동에 온힘을 쏟았다.
지영희가 채보한 무속장단 육필 악보
지영희는 굿 음악을 중심으로 채보를 많이 했지만 민요도 빠트리지 않았다. 각 도별 민요는 물론 특히 호남지방 민요 채보와 편곡을 했고 이때 단거리 이동 수단은 자전거였다.
그는 작곡을 배우기 위해 ‘가고파’를 작곡한 서양음악 작곡가 김동진과 작곡가 김희조를 모셔다 부인 성금연과 함께 작곡 개인레슨을 받기도 했다.2)
지영희가 공을 들인 국악 채보와 작곡은 기존의 장르와 전혀 새로운 방식의 국악관현악단으로 승화됐다.
국악기로도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다양한 서양음악도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해 그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국악관현악단이었다.
지영희는 1947년 국극 ‘선화공주’를 공연할 때 12인조 악단을 무대 전면에 내세워 연주했으며, 1962년 ‘악성추모제’에 국악예술학교3) 50여 명의 학생들로 관현악단을 조직하여 초연(初演)하였다.
관현악단이 처음으로 연주한 ‘청하지곡’은 그의 창작 관현악곡이었다.
악기 개량에 나선 지영희
관현악에서 국악기가 낼 수 없는 베이스음을 얻기 위해 악기개량도 시도하였다.
지금도 국악 현장에서 사용하는 공후, 비파, 대해금 같은 다양한 악기들은 지영희의 피나는 고뇌와 노력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관현악단은 기존의 국악기로는 음역을 폭넓게 소화해낼 수 없기 때문에 지영희는 악기 개량 작업을 시작했다.
국악예술학교 한편에 악기제작소를 만들고 악기제작자를 상주시켜 새롭게 연구한 악기 도면을 내밀며 국악기 제작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비파나 공후 같은 고대악기들을 개량해서 기존 국악기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음역대를 표현해 내곤 했다.4)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국악관현악단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세계민속예술제’에 한국대표로 참가해 큰 호응을 얻었다.
1963년에는 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악관현악단을 조직하고 창작곡 ‘신아위’를 지휘하였다.
학생국악관현악단을 모태로 1965년에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을 조직한 지영희는 제1대 악장에 취임하였고, 이듬해부터는 상임지휘자로 활동하였다.
부부 국악인 지영희·성금연 연주 음반
지영희의 국악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음반작업과 방송활동 그리고 영화음악 작업이다.
지영희가 처음으로 음반을 취입한 것은 서울로 상경하던 1937년 빅터레코드사의 민요와 대풍류다.
그 뒤로 한성준 조선음악무용연구소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빅터레코드를 취입하고 국악방송을 하였으며, 해방 후 고려레코드사에서 민요 60여 곡을 녹음하였다.
1947년에는 서울방송국의 전속국악사로 활동하였으며,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 서울 중앙방송국 국악전속 민요연구회에 입회하였다.
1956년에는 서양악기로 국악민요를 연주하여 80여 곡을 녹음하였으며, 킹스타 레코드사에서 고전음악 100곡을 취입하여 해외 판매를 시도하였다.
2003년 발매한 <해금시나위와 산조>에는 해금 시나위 명인 지영희와 해금 산조 명인 한범수가 대금산조 등의 여타 산조 가락을 이용하여 구성한 해금산조를 실어 우리나라 해금산조의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하였다.
특히 가슴을 저리게 하는 해금의 음색이 경기남부와 남도지역에서 전승되는 육자배기조 선율의 슬픈 느낌을 더해 준다.
해금으로 연주하는 시나위는 주로 경기와 남도지역의 무속음악에서 사용하는 반주음악으로 도살풀이, 모리, 살풀이 등의 장단에 맞추어 연주한다.
이 음반에는 지영희가 연주한 시나위-무장단의 즉흥연주, 시나위-도살풀이, 시나위-모리, 시나위-살풀이, 산조-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와 한범수가 연주한 산조-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가 수록되어 있다.
지영희는 1950~1960년대에 영화음악에도 참여해 신상옥 감독의 사극영화 대부분의 배경음악을 맡았다. 그 가운데 ‘벙어리 삼룡’, ‘월하의 공동묘지’, ‘장희빈’은 지영희가 배경음악을 녹음한 대표적인 영화다.
무속음악인으로 천대받던 자신처럼 우리의 전통음악이 빛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영희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국악교육이었다.
1960년에 개교한 국악예술학교는 박헌봉, 박귀희, 김소희 등 당대 최고의 국악인들과 뜻을 같이해 설립했으며, 지영희는 실기지도를 책임지는 예술부장으로 월급도 없이 가난한 학생들을 불러 모아 국악을 가르쳤다.5)
지영희의 교수법은 기본을 매우 강조하는 방식이었다.
피리연주에서도 반드시 폐활량 키우기 훈련을 먼저 한 뒤에 연주법을 익히도록 했는데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좀 더 성숙된 연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특히 제자들이 중·고등학교에서만 국악을 전공할 것이 아니라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졸업한 후 교수나 전문연주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6)
그 결과 수많은 전문연주자와 국악교육자를 배출했다. 지영희류 피리 산조를 계승한 최경만, 박범훈, 이종대, 박승률, 김광복, 송선원, 한상일, 김재영, 해금을 계승한 김영재, 최태현, 김무경, 신상철, 박정실, 홍옥미, 백정순, 대금의 이철주, 김방현, 최상화, 장구와 피리의 장덕화, 김덕수, 김용배, 최종실, 남기문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국내 많은 대학과 국악단 등에서 후학을 육성함은 물론 연주에서도 독보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교사 재직 당시 지영희는 “가락은 몸으로 전수 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자신의 육성과 가락을 테이프에 녹음하여 제자들에게 전수한 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유일무이한 일대 사건이었다.
민속 기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산조는 작곡자와 연주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던 시절에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집대성하여 가락을 짠 뒤 본인의 이름을 붙여 연주했다.
지영희는 자신만의 연주 세계를 구축해 지금도 많은 후배 국악인들이 그의 산조를 받아들이고 있다.
연주하지 못하는 악기가 없을 정도로 여러 악기에 두루 능통했던 지영희의 신명과 열정으로 가득 찼던 삶의 자취는 ‘지영희류 해금산조’와 ‘경기 대풍류’ 등의 진수를 만들어 냈다.
해금을 연주하고 있는 지영희
해금산조는 20세기 초반에 지용구 해금 명인에 의하여 창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후에 지영희, 한범수 명인 등이 해금산조의 골격을 완성하였다. 현재 많은 연주자들에 의해 연주되고 있는 지영희류 해금산조는 대금산조의 선율을 많이 본받았고, 섬세하고 굴곡이 많으며 경기도 민요처럼 가볍고 경쾌하면서 중중머리 부분에서는 익살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한범수류는 부드럽고 유연한 진행을 보이며, 가야금 선율을 많이 인용했다.
‘대풍류’라고 많이 알려진 관악기 중심의 멋스러운 합주곡인 ‘경기 대풍류’는 서울, 경기지역의 민간 음악인들이 전승해 온 합주곡으로, 염불(느린염불-반염불), 타령(허튼타령-중허튼타령-자진허튼타령), 굿거리(굿거리, 자진굿거리), 당악 등으로 이루어진 곡이다.
현재 국립국악원 등에서 연주하는 대풍류는 1960년대 지영희 명인이 구성해 전한 것이다.7)
지영희는 1972년 성금연, 김소희, 김윤덕과 함께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하는 영예를 얻었고, 1973년 시나위로 국가무형문화재 제52호에 지정되었다.
하지만 지영희는 당시 국내에서 벌어진 국악계의 갈등 상황과 모든 국악의 뿌리였던 민속음악에 대한 천대 등을 이기지 못하고,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라는 명예를 뒤로 한 채 1974년 부인 성금연과 함께 하와이로 이민의 길을 택한다.
이민 후에도 오로지 국악 발전에 몰두해 오던 지영희는 하와이대학 강연과 국내에 있는 제자들에게 악보와 연주 테이프를 보내는 일을 해왔다.
지영희와 성금연의 폭넓고 해박한 음악지식과 뛰어난 연주 실력,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하와이 이민으로 순식간에 사라진 것은 우리 국악계의 큰 손실이었다.
하와이 이민시절에도 지영희는 국악의 장래를 염려하여 고국에 있는 제자들과 지인들에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전해주기 위해 힘을 쏟아 부었다.
이때 장구로 사라져가는 진세 외 16장단을 녹음해 제자들에게 건네줘 사물놀이 창시자인 김덕수, 최종실 등이 그 녹음테이프를 듣고 학습할 수 있도록 했다.
지영희는 제자들에게 전수할 목적으로 장단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을 곁들여 진세장단과 올림채장단 등을 녹음하며 그가 알고 기억하는 것을 모두 쏟아냈다.
하와이에 이주해 제자들을 위해 녹음이라도 남기고 죽어야 된다는 심정으로 녹음에 임해 지금 그 가락이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게 됐다.
해외에서의 활동과 제자 육성에 끈을 놓지 않았던 지영희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뒤로한 채 1980년 2월 2일 73세의 나이로 이국 땅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해금산조와 피리 시나위의 명인 지영희는 한국음악의 예인(藝人) 중에 예인으로 연주, 교육, 지휘, 춤, 영화음악, 악기개량, 국악관현악단 결성, 국악 현대화 등 민속음악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겨 현대 국악사에 큰 획을 그었던 인물이다.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을 지휘하는 지영희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 지영희
지영희의 위대성은 전통이 갖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것은 지키면서 우리 국악을 현대화 했다는 것이다.
서양의 오선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필요성을 일찌감치 알아 몸소 배운 후 가르쳤으며, 이제는 우리 국악을 학문화하고 이론화해야 된다는 것을 인식해 스스로 실천해 나간 국악계의 혁명가였다.8)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쳐보지도 못하고 자칫 굿판을 맴돌 뻔한 그가 상상할 수 없는 노력 끝에 해금산조와 피리 시나위 명인으로, 한국음악 중흥의 도화선이 된 국악관현악단 창단의 주역으로 현재와 같이 한국음악을 꽃피우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지영희만의 안목지(眼目知)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9)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임봄은 민족음악의 아버지인 악성 지영희가 우리 국악 발전을 위해 헌신한 업적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전승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그의 위대했던 삶을 추모시로 노래했다.

민족음악의 아버지 지영희를 기리며

임봄10)/시인·문학평론가 그것은 평택 포승 앞바다에서 탄생한 것
천대받던 지문일가(池門一家)의 세습무(世襲巫)와
바다로 나간 장정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피리와 해금 호적소리 가득한 굿판으로부터
즉흥적인 가락이 온몸으로 스민 경기시나위

해금과 피리를 독주악기로 만들며
서양음악의 개방에 맞서려 했던
젊은 음악인의 피맺힌 고뇌와 절규의 가락
경기민요인양 경쾌하고 익살스럽게 파고드는
섬세한 굴곡의 해금산조와
태평소와 장구가락을 자유로이 휘젓는 연주는
끝내 우리의 것을 지키려던 그의 굳은 신념

채보, 작곡, 음반, 방송, 영화음악까지
역사에 길이 남을 그의 투혼은
국악학교를 세워 가르쳤던 우리민족의 얼과
제자들에게 전수한 교육으로 살아남아

아직 끝나지 않은 그의
원대한 꿈을 아는 자 누구인가
평생을 천대받는 화랭이(花郞)의 운명처럼
낯선 하와이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국악을 현대화 한 민족음악의 아버지
국악을 학문화 한 실천의 혁명가
살아있는 자유로운 푸른 영혼으로
우리의 것을 지켜낸 위대한 음악가

꺼지지 않을 등불
그의 이름은
지, 영, 희!

각주

1. 박범훈 중앙대학교 총장(면담 당시), 평택향토사연구소 박성복·김해규 연구위원 면담, 2010. 8. 2. 김영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면담 당시), 평택향토사연구소 박성복·김해규 연구위원 면담, 2010. 8. 3. 개교 당시 사립이었던 국악예술학교는 2008년 국립으로 전환되면서 학교명도 전통예술중·고등학교로 변경됐다. 4. 최태현 중앙대학교 국악대학장(면담 당시), 평택향토사연구소 박성복·김해규 연구위원 면담, 2010. 8. 5. 최태현 중앙대학교 국악대학장(면담 당시), 평택향토사연구소 박성복·김해규 연구위원 면담, 2010. 8. 6. 최경만 중앙대학교 교수(면담 당시), 평택향토사연구소 박성복·김해규 연구위원 면담, 2010. 8. 7. 박성복, 「평택의 전통 예인」,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 평택 2011』, 평택문화원, 2011. 8. 김덕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면담 당시), 평택향토사연구소 박성복·김해규 연구위원 면담, 2010. 8. 9. 박성복, 「평택의 전통 예인」,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 평택 2011』, 평택문화원, 2011. 10. 임봄 시인·문학평론가는 경기도 평택 출생, 2009년 『애지』로 시 등단, 2013년 『시와 사상』으로 평론 등단, 시집 『백색어사전』이 있다. ※ 지영희 선생 일대기는 2016년 12월 31일 평택문화원에서 발행한 박성복 著 <평택인물지4-평택의 전통예인> 中 지영희 부분을 발췌했음.